이기주의는 인간의 본성인가?
아마 많은 이들이 오늘날의 대다수 한국인들은 이기주의자라는 말에 동의할 것이다. 이기주의자라는 것은 이웃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자기 개인의 욕망이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이 이기주의자가 되어버린 세상이 도래하자 상당수의 서구 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이 이기주의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이므로 개인이기주의에 기초하는 자본주의 제도야말로 인간의 본성에 가장 잘 맞는 이상적인 사회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이기주의가 아니라는 것은 그것이 정신건강과 행복을 파괴한다는 사실 한 가지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무릇 생명체는 자기의 본성대로 살아야 정신이 건강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 예를 들면 호랑이의 본성을 육식을 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호랑이는 육식을 해야 행복하다는 것이다. 만일 호랑이가 자기의 본성에 맞지 않게 채식을 강요당한다면 미치거나 죽게 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이 이기주의라면 사람들은 이기적으로 살수록 정신이 더 건강해지고 행복해질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연구들은 이기적으로 사는 사람일수록 심신의 건강이 더 나쁘며 더 불행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이기주의가 인간의 본성과는 거리가 먼 의식이고 심리라는 것을 말해준다.
오징어게임과 이기주의
이기주의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면 한국인들은 왜 이기주의자가 된 것일까? 즉 예전에는 이기주의자가 아니었던 한국인들이 어떤 이유 때문에 이기주의자가 되어버린 것일까? 드라마 <오징어게임>에는 사람들이 서로를 경계하고 속이며 괴롭히고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모두가 이기주의자가 되어버린 끔찍한 세상의 상징이자 축약판이라고 할 수 있다. 오징어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원래부터 악당이어서 서로에게 못되게 굴었던 것일까? 아니면 오징어게임이 그들을 악당이 되도록 강요한 것일까? 아마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후자라고 대답할 것이다.
드라마 <오징어게임>에는 서울대 출신의 지식인 악당인 상우가 등장한다. 그러나 상우도 게임이 일시 중지되어 현실로 돌아왔을 때는 나름 착한 사람이 된다. 그는 한 외국인 노동자가 차비가 없어서 집에 걸어가야 한다고 말하자 자기 지갑에 있던 돈을 꺼내어 그에게 건넬 줄 아는 정도의 따뜻한 마음은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드라마 <오징어게임>은 사람들을 이기주의자로, 악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인간 본성이 아니라 잔인한 오징어게임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고립적 생존 불안
한국이 신자유주의 체제로 전환되는 분기점이었던 9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인들은 이기주의자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부터 한국에서는 승자독식의 개인 간 경쟁과 개인 간 불평등이 본격화되어 인간관계가 빠르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모든 공동체가 붕괴되었고 사람들은 개인 단위로 파편화되고 고립되었으며 심각한 생존 불안과 존중 불안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풍요중독사회』(김태형, 한겨레출판)를 참고하라) 이번 글에서는 지면 관계상 생존 불안에 대해서만 다룰 것이다.
생존 불안은 간단히 말해 먹고 사는 것과 관련된 불안이다. 절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생존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이들은 9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경제가 성장해 과거에 비해 부유해졌는데 왜 생존 불안이 더 심해졌느냐고 묻는다. 생존 불안은 단지 절대적인 소득 수준과만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관계의 질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떤 가난한 마을이 있다고 해보자. 이때 마을 사람들이 사이가 좋고 화목하게 지내고 있다면 가난에 따른 생존 불안의 위력은 큰 폭으로 약화된다. 자기 혼자만 가난한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가 가난한 것이고 생존의 어려움을 서로의 공감과 사랑, 지지와 격려 등을 통해 이겨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어떤 집에 쌀이 떨어져서 굶어죽을 위기에 처하면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반면에 마을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나빠서 불화하고 있다면 생존 불안은 극단적으로 심해진다. 다른 사람들의 상황은 잘 알지 못하고, 굳이 알고 싶어 하지도 않으므로 ‘나만 가난하다’는 느낌에 시달리면서 생존의 어려움을 홀로 감당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쌀이 떨어져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하더라도 그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생존 불안이 사이좋은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함께 가난을 헤쳐나가는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생존 불안은 사이 나쁜 사람들이 서로에게 욕을 하거나 칼부림을 하면서 홀로 가난에 맞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함께 겪는 생존 불안은 비교적 잘 견뎌내며 그것을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 등을 통해 해결하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 간의 관계는 더 좋아진다. 반면에 사람들은 혼자 고립되어 겪는 생존 불안은 이겨내지 못한다. 그 결과 고립적 생존 불안 수준에 비례하여 사람들은 이기주의화되며 일부는 그것을 견뎌내지 못해 자살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관계는 더욱 악화된다.
젊은이들은 왜 사회개혁에 무관심한가
고립적 생존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기주의자로 전락한다. 당장 내가 죽게 생겼는데 이웃이나 공동체를 돌아볼 마음의 여유 따위는 없다.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만 쳐다보기에 이기주의자의 시야는 협소해진다. 그의 눈에는 이웃이나 공동체는 보이지 않으며 오직 자기 자신만 보인다. 세계를 철두철미하게 이기적인 견지, 자기중심적 입장에서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이 다른 세대에 비해 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것은 그들이 어려서부터 고립적 생존 불안의 공격을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는 적어도 어렸을 때에는 집단적 생존 불안만을 겪었을 뿐이고 어른이 되면서부터 고립적 생존 불안에 시달렸다. 반면에 젊은 세대는 성인이 아니라 아주 어려서부터 고립적 생존 불안을 겪었다. 그들의 생존 불안 수준이 모든 세대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은 이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고립적 생존 불안에 시달려 이기주의자로 성장한 젊은이들에게 이웃이나 공동체는 관심 밖의 일이고, 사회를 개혁해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은 별나라 얘기일 뿐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사회개혁에는 등을 돌린 채 오직 자신의 취직, 생존에만 몰두하며 각자도생의 길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고립적 생존 불안은 21세기형 채찍
고립적 생존 불안은 21세기형 채찍이다. 과거에 지배층들은 국민을 지배하고 착취하기 위해서 채찍을 휘둘렀다. 노예들의 등에다 채찍을 내리치며 자기들 말을 들으라고 강요한 것이다. 80년대까지 한국의 지배층은 국민을 지배, 통제하기 위해 주로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했다. 예를 들면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전기고문, 물고문 등으로 굴복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채찍에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워 군부독재를 끝장내버렸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에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지금에 비해 훨씬 양호해서 힘을 합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80년대의 폭발적인 민주화투쟁 이후 사회가 민주화되자 지배층은 더이상 채찍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지배층은 국민을 지배, 통제하려는 욕망을 순순히 내려놓고 착해졌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채찍보다 더 강력한 지배, 통제 수단을 발명했는데 그것이 바로 고립적 생존 불안이다. 지배층은 사람들을 개인 단위로 분열시켜 서로 싸우게 만들고 개인들에게 생존 불안을 강요함으로써 국민을 더 효과적으로 지배,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갑질을 당하거나 불의한 일을 강요당해도 저항하지 못한다. 직장에서 잘리면 온 가족이 죽는다는 고립적 생존 불안에 압도당하고 있어서다. 여성들은 위계를 이용한 성희롱이나 성폭력에 제대로 항의하거나 저항하지 못한다. 그랬다가는 밥줄이 끊길 수 있다는 고립적 생존 불안에 결박되어 있어서다.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에는 “야, 너는 자존심도 없냐? 어떻게 그런 일을 당하고도 참냐?” “부당한 일인 줄 알면서 왜 지시를 따랐냐?”라는 질타를 받으면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장면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번에 딸이 대학에 입학하거든. 등록금이 필요해.”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계셔서 어쩔 수 없었어.” 이런 대답들은 고립적 생존 불안이 얼마나 압도적인지, 즉 사람들이 고립적 생존 불안을 거의 이겨내지 못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고립적 생존 불안은 과거의 채찍을 대체한 21세기형 채찍이다.
이기주의와 인간의 질 저하
이기주의는 무엇보다 인간의 질을 떨어뜨린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이기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은 곧 그들이 사익추구형 인간, 생계형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공익이나 공동체를 중시하지 않고 사적인 욕망과 이익만 추구하는 인간을 질이 낮은 인간으로 간주해왔다. 예를 들면 국가나 사회를 위한 정치를 하지 않고 사리사욕만 채우려는 정치인을 경멸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정치인다운 정치인, 교수다운 교수, 의사다운 의사, 언론인다운 언론인 등을 찾아보기 어렵다. 정치인들은 국가가 아니라 사익을 위해 금배지를 달려고 하고, 언론인들은 진실을 파헤치고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벌이를 위해 펜대를 놀린다. 모두가 자기의 밥그릇을 위해 혹은 더 많은 돈을 위해 질주하는 사회에서 정치인다운 정치인, 언론인다운 언론인의 씨가 마르는 것은 당연하다.
생계형 이기주의자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절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이기주의자가 된 것은 무엇보다 고립적 생존 불안 탓이다. 이것은 절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이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절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없이 이기주의를 선택한 소극적이고 비자발적인 생계형 이기주의자, 양성 이기주의자다. 반면에 한국의 지배층과 엘리트층은 생계형 이기주의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이기주의자, 악성 이기주의자다.(다음 번 글의 주제)
우리가 이기주의의 덫에서 빠져나와 다시 공동체주의자 혹은 우리주의자(『한국인의 마음속엔 우리가 있다』 김태형, 2023, 온더페이지 참고)가 되어 화목하게 살아가려면 우선적으로 ‘고립적’ 생존 불안을 ‘집단적’ 생존 불안으로 시급히 전환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소득과 같은 고립적 생존 불안을 완화하는 제도와 정책을 도입하고 인간관계를 호전시키며 공동체를 복원해야 한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생존 불안 자체를 완전히 해결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