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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학 - 계정혜(戒定慧)

삼학 - 계정혜(戒定慧) - 서광 스님 동국대 겸임교수


삼학-계(戒)
 
악행을 그치고 선을 행하는 자발적 도덕행위 무조건 지키기보다 올바르게 지키는 게 핵심

​계학(戒學)은 수행하는 자가 반드시 닦아야 하는 근본수행, 또는 삼독을 다스리는 바른 수행으로서 계정혜(戒定慧) 세 가지 배움 가운데 첫 번째다. 흔히 계는 악행을 그치고 선을 행하는 자발적인 도덕적 행위인 반면에 율(律)은 교단의 강제적 규율로 타율적인 법률에 비유된다. 수행하는 대상에 따라서 5계, 10계, 250계, 348계 등 다양하다. 그런데 지난 호에서 팔정도(八正道)의 핵심은 ‘올바른(正)’의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올바른은 선(善, wholesome)한 또는 건강한 의도, 동기를 의미한다. 불선(不善, unwholesome)하고 불건강한 의도로 지켜지는 계는 마치 무조건 가르치는 일에만 몰두하고(敎), 그 가르침이 실제로 피교육자를 성장시키는지(育), 아니면 반대로 역효과를 일으켜서 도리어 성장을 방해하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그렇다면 선하고 건강한 의도와 동기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들의 정신특질 가운데 탐욕, 화, 어리석음, 질투 등과 반대되는 고귀한 정신들, 즉 자애, 연민, 사랑, 용서, 인내, 책임감, 내적 조화로움 등 자신과 타인의 행복과 성장을 가져다주는 영적 특질들을 촉진시키고 배양하고자 하는 의도와 동기를 말한다.

반면 불선하고 불건강한 의도와 동기는 탐진치 삼독에 바탕을 둔 계행을 의미한다. 또한 4종류의 자아의식, 즉 아만, 아애, 아견, 아치를 밑바탕에 깔고 하는 행위를 말한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낮은 차원의 동기에 의해 지켜지는 계는 자신과 타인을 위해 궁극적으로 아무런 유익함을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보조국사가 계를 지키고자 할 때는 ‘선지지범개차(先知持犯開遮)’, 계를 지키고 파하고 열고 닫을 줄을 먼저 알라고 했겠는가.

치유적 관점에서 불선하고 불건강한 의도에서 행해지는 계는 자신과 타인의 정신적·신체적 괴로움과 병을 유발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계행을 통해 칭찬과 인정을 구하고 보상을 기대하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주어지지 않으면 그들의 마음은 무의식적 화와 적개심으로 채워지게 된다. 또한 그들의 내면은 자신과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 이들을 향한 미움과 비난, 자만으로 출렁이게 된다. 그래서 불선한 의도로 계를 지키는 이들은 자애로움, 연민, 친절함, 겸손, 등의 고차원적 정신특질들이 결여되어 있다.

한편, 선하고 건강한 의도로 지켜지는 계는 정신-신체적 기쁨과 성장을 유발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계를 지키고, 범하는 의도와 동기는 온통 자신과 타인의 유익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에 집중됐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 계는 타자의 웰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선한 의도로 계를 지키는 이들은 평화롭고 따뜻한 온기를 풍긴다. 그들에게서 풍겨나는 계의 향기는 세상을 정화시키고 보는 이로 하여금 선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조건 지어진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 그들은 상대적이고 연기적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진실되고 유익한 계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시간과 공간, 상황과 조건에 맞게 변화하지 않고 고정된 계는 무지와 집착의 산물일 뿐이다. 물처럼 흐르지 않고 고착된 계는 향기가 없다. 부드럽게 휘지 않는 딱딱한 계는 무지의 다른 모양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선하고 건강한 의도에 바탕을 둔, 치유적인 계행을 실천할 수 있을까? 그건 계를 행하는 순간을 자각하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자각이 동반되지 않는 계행은 충동적, 반사적, 습관적, 조건 지어진 반응에 불과할 뿐이다. 자각과 알아차림이 함께 하는 의도만이 우리를 보다 나은, 보다 건강하고 성장하는 세계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는 자신과 타인의 행복·성장위한 것
관습·전통 얽매이면 오히려 병 원인돼

​가끔 불교공부를 하다보면 과거 영어공부하던 때가 생각난다. 관계대명사니, 관계형용사니 하면서 실컷 어렵게 공부하고 죽도록 외워서 책 한권을 떼고 나서도 정작 영어로 말 한마디 못하고 얻은 것이라고는 영어에 대한 좌절과 콤플렉스뿐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왜였을까? 그건 영어공부의 궁극적 목적을 망각했기 때문이거나, 영어가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러는 우리 가운데 계율이 왜 필요한지, 그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치 계행을 영어공부 하듯이 그렇게 힘들게 억지로 지키는 경우도 있다. 계율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자칫 우리 시대의 기본 상식과 교양에도 미치지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규칙들을 붙들고 버리지도, 지키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입장에 처하는 수가 있다. 이미 유행이 지난 낡은 헌옷가지를 붙잡고 버리기 아까워하지만 결국 입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어떤 계율이 우리 시대의 상식과 교양에도 미치지 못하는, 유행이 지난 낡은 헌옷가지와 같다는 말인가? 남녀차별적 조항들이 거기에 해당한다. 과거 관습과 가치, 문화에만 적용되는 조항들 또한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이들은 한정된 지역, 대상에만 해당하거나, 특정한 계층, 부류, 집단들을 옹호하거나 차별하는 저급한 문화, 가치, 관습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과 공간에 연기적으로 반연하고 무상(無常)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조항들에 집착하는 특정한 부류들로 하여금 4가지 자아의식(아치, 아만, 아견, 아애)을 불합리하고 불건강하게 채워주고 강화해주고 부추기기 때문이다.

치유적 관점에서 보면 계율은 그 자체가 완벽한 치유, 치료수단이다. 왜냐하면 계율은 자애, 연민, 사랑, 용서 등과 같은 고귀한 영적 특질들을 촉진시키고 배양하고자 하는 의도와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자신과 타인의 행복과 성장, 웰빙을 추구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율은 자신과 타인의 불행과 불건강을 유발하는 요소들과 행복과 건강을 유발하는 요소들을 배우고 그것을 일상의 삶에서 훈련하고 알아차리는 행동, 말, 생각을 수술하는 뛰어난 치료방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소위 계를 잘 지키는 사람들을 보면 어쩐지 부담스럽고 가까이 대하기 불편한 경우가 있다. 더욱이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자신의 계행이 무슨 권력을 낳는 수단이라도 되는 듯이 고압적이고 무례하기까지 하다. 뿐만 아니라 단지 자신이 남자(비구)라는 이유만으로 여자(비구니)보다 우월하다는 허망한 생각으로 무지를 살찌우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무조건 몸으로 금욕하고 생각으로 엄격하다고 해서 계율을 잘 지키는 율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율사는 따뜻하고 공경스러운 말과 특히 어질고, 자애로움과 연민심이 많아야 한다. 계율의 근본 뜻을 알지 못하고 지금·여기에 합당한 시절인연, 즉 사회적 도덕성과 상식, 교양을 무시한 채 관습과 전통만을 강조하게 되면 계율적 금욕은 무리한 억압이 되어 도리어 말과 생각이 거칠어지게 된다. 그러한 사람들은 비록 스스로 선택해서 지키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계행은 스트레스를 낳고, 그 스트레스는 다시 병이 되어 주변을 힘들고 병들게 하는 병인(病因)으로 작용하게 된다.

계행은 무조건 힘들고 어렵게 지켜지거나 모셔져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렇게 행해지는 계행에는 향기가 없기 때문에 고요함의 향기(定香)와 지혜의 향기(慧香)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계행은 행동, 말, 생각의 수정, 대수술을 통해 가장 극적인 치유적 효과를 기대하는 불교공부의 핵심적 방편이다.

 오직 시절인연에 반연하면서 4가지 치성한 자아의식을 내려놓으려는 올바른 의도와 노력으로 행해지는 계행만이 자신과 이웃에게 신선함, 기쁨, 정화된 마음, 평화로움을 전달한다.


삼학-정(定)

정은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마음상태
산란한 마음 특정 대상에 집중시켜라


삼학의 두 번째 수행인 정(定)은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움직이지 않는 안정된 마음상태를 말하며 산스크리트어로는 사마디(samadhi), 음역해서 삼매라고 한다. 한편 선(禪)은 원래 삼매에 도달하기 위해서 마음을 한 대상에 집중하는 수행을 뜻하는 것으로 산스크리트어로는 드야나(dhyana)라고 하고, 이를 음역해서 선나(禪那)라고 하는데 줄여서 선(禪)이라고 한다.

보통 선과 정 즉, 사마디와 드야나를 합친 선정을 삼매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선정을 줄여서 정(定)이라고 한다. 우리는 선정을 얻기 위한 수행법을 흔히 지(止), 념(念), 선정명상, 또는 집중명상이라고 하는데 이는 주의를 한 곳에 집중하고 유지함으로서 고요하고 평온한 흔들리지 않는 마음상태를 경험하고 계발하는 것이다.

삼학의 첫 번째인 계는 일상생활 속에서 건강한 심리상태를 유발하는 행동과 불건강한 심리상태를 유발하는 행동들을 구분한다. 그런 다음 불건강한 생활습관과 패턴에 대한 주의와 조절, 통제능력을 향상시킴으로서 건강한 생활습관 패턴으로 변화하고 교정하는 일에 관여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정은 일상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내적, 외적 대상들에 의해 마음을 빼앗기고 산란하고 복잡해진 불안정한 마음을 안정시키고 가라앉히기 위한 방법으로 특정한 대상에 주의를 집중하는 명상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은 심리치유적 관점에서 볼 때, 일차적으로 불안하고 혼란된 마음에 정서적 안정을 가져다주는 직접적 역할을 한다. 나아가서 감정, 정서를 조절하는 능력을 향상시킨다. 그 결과 감정과 정서적 혼란으로 초래되는 주의조절 능력과 집중력의 결핍을 방지하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시각, 사고능력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가 선정수행을 잘 닦아서 어지럽고 산란한 정서가 고요해지고 멈추어졌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물론 감정, 정서가 고요해지고 멈추어졌다는 표현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의 표면과 현상에 대한 설명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정서나 감정은 마음의 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감정과 정서는 의식수준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표면이고 그 보다 더 깊은 심층에서 우리의 감정과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장본인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유식의 관점에서 보면 감정과 정서의 일차적 뿌리는 자아의식이다. 자아의식의 작용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거듭 언급했었지만 그래도 모든 고통과 갈등의 근원은 이 자아의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거듭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믿는다. 선정의 상태, 삼매의 상태에서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멈추었다는 의미는 바로 이 자아의식, 제7 말나식이 움직이지 않고 멈추었다는 뜻이다. 즉, 아만·아애·아견·아치의 네 가지 작용이 그쳤다는 뜻이다.

가끔 선종의 간화선 수행이 체계적이고 기본적인 교리적 바탕이 없이 최고의 경지인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한번에 바로 여래의 경지에 도달한다)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비판적 시각으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치유적 관점에서 보면 다르다. 즉 네 가지 자아의식을 내려놓기 위해서 어렵고 복잡한 교리공부가 필수조건은 아니다.


또한 선정수행의 과정에서 감정과 정서의 변화 상태를 엄청나게 세밀하게, 일일이 알고 알아차리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네 가지 자아의식이 멈추어지는 것도 아니다. 감정, 정서의 뿌리가 자아의식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들의 변화와 상태에만 매달린다면 오히려 목적 없이 헤매는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

감정과 정서 상태를 자각하는 일은 어떤 정서적 변화과정을 추적하고 규명하는데 그 궁극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식의 작동을 멈춤으로서 우리들 존재의 실상인 연기적 삶과 관계를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정수행의 궁극은 자아의식의 멈춤
진정한 자유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우리는 주의를 한 곳에 집중해 산란하고 복잡한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고 멈추게 하는 선정(禪定)수행이 정서를 안정시키고, 조절하고, 자각하는 능력을 증진시키는 최고의 치유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선정수행이 치유적 효과를 갖기 위해서는 정서, 감정의 뿌리가 아만·아애·아견·아치의 네 가지 자아의식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다. 또한 선정수행의 궁극적 목적은 감정, 정서의 고요함이나 편안함을 넘어 자아의식의 작용을 멈추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이는 선정수행의 의미와 가치가 우리 마음의 거울을 깨끗하고 맑게 유지함으로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볼 수 있도록 하는데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욕망이나 화, 무지로 인해서 현상을 왜곡하거나 투사하지 않고 얼마나 있는 그대로 잘 비출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네 가지 자아의식의 작용여부와 그 정도에 달려있다.

그러면 치유적 관점에서 위의 사실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우리는 흔히 선정수행의 궁극적 목표는 주관과 객관의 구분이 끊어진 적멸한 상태인 삼매체험에 있다고 들어왔다. 그런데 만일 그와 같은 삼매체험이 일상의 삶에서 자아의식의 작용기능을 완화시키고 약화시킴으로서 보다 원만하고 조화로운 인간관계와 행동방식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면 삼매가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다시 말해 자아의식의 작용이 멈춤으로서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선정상태의 체험이 이후의 일상의 삶과 인간관계에 전이효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선정수행이 현실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 마음, 온몸으로 자아와 현실을 직면하고 극복, 초월하도록 돕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런데 자아의식이 왜 나쁜가? 자아의식이 작용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대주혜해(大珠慧海) 선사가 수행의 효용을 묻는 질문에 보통 사람들은 밥 먹고 잠자면서 온갖 잡생각을 다하지만 자신은 밥을 먹을 때는 그저 밥을 먹고, 잠을 잘 때는 그저 잠을 잘 뿐이라고 대답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여기서 잡생각은 일종의 자아의식이다. 자아의식이 작동하면 우리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경험을 있는 그대로 체험하지 않고, 그 경험에 대한 소유권을 투사하게 돼 나의 경험, 나의 생각, 나의 느낌이라고 주장하고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생각이 다르고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갈등하게 되고, 그것이 지나치면 미워하고 분노하게 된다. 그 결과 우리의 경험은 있는 그대로의 신선함을 잃고 퇴색하게 되어 더 이상 여기-지금(hear and now)의 경험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심지어 자아의식은 우리가 사랑할 때도 그냥 사랑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체험 그 자체는 우리들로 하여금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하고 존재감의 극치를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삶은 고통이 아닌 선물임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런데 자아의식이 작동하게 되면 사랑의 대상에 집착하게 돼 그 결과 사랑은 사라지고 소유권, 집착만이 남게 된다.

이처럼 자아의식은 체험을 체험으로 두지 않는다. 체험의 다양성은 그 자체로 신선하고 고유하기 때문에 호기심을 자극하고, 창의적이다. 그런데 자아의식은 우리들의 다양한 인생체험과 경험, 그리고 그 대상들을 분별하고 비교해 우열을 가림으로서 열등감과 우월감을 조장한다. 또한 옳고 그름의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비난·칭찬·인정 등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만든다.

선정수행은 그러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고요히 잠재우고, 출렁이는 마음들의 틈새로 드러나는 자아의식의 존재를 조금씩 알아차리도록 돕는다. 그리고 그 모양이 완전하게 드러나고 선명해지는 순간, 우리는 마침내 우리들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지나친 내면 몰입은 외부와의 단절 초래
연기적인 삶 위해 안팎 조화롭게 살펴야


선정수행이 자칫 마음의 내면에 집중되고 몰입되면 마음의 외부 현상과의 단절, 무지와 같은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우리 가운데 더러는 마음수행의 의미를 오해해서 우리 사회와 세상의 일에 무관심하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지한 것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삼매체험에 대한 오해와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짐작된다. 즉 삼매하면 일단 뭔가 신비적 의식상태를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된다.

물론 인식의 주체와 대상이라고 하는 이원적 지각을 바탕으로 평소의 의식과는 달리 주객이 하나 되는 경험은 신비적 심리상태를 유발함은 틀림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목적은 아니다. 내면세계에 대한 추구와 열정으로 오랫동안 현실세계를 망각하거나 건성으로 대해도 좋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선정수행은 그 방법이 무엇이든 결과적으로는 현실을 보다 정확히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킴으로서 현실의 삶에 더욱 더 충실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정(定)은 심리치유적 관점에서 볼 때, 불안하고 혼란한 감정과 정서를 자각하고 조절하는 능력을 향상시킴으로서 마음에 정서적 안정을 가져다주는 직접적 역할을 한다. 그 결과 감정과 정서적 혼란으로 초래되는 주의조절능력과 집중력의 결핍을 방지하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사고능력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선정수행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 세계를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이고 행복한 삶을 사는데 필요한 결정적인 능력을 배양하도록 돕는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행복한 삶이나 웰빙, 성공적인 대인관계를 위해서는 정서·감정 조절능력과 스트레스 관리능력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열심히 선정수행을 닦아왔기 때문에 현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변화하고 있는지에 대해 오히려 둔감하고, 또 앞으로 어떤 세상이 전개될 것인지에 대한 예견력이 없다면 그건 무엇 때문인가? 그건 수행방법의 적용, 효과, 또는 목적과 관련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타자, 세상, 현상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잘 아는 것이 과연 이치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그게 가능하다면 선(禪) 수행의 과정을 그린 심우도를 주객이 하나가 되는 8단계로 끝내지, 굳이 세상 속으로 돌아가는 9단계와 10단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었을까?

자아의식은 일상의 인간관계와 현실생활 속에서 가장 활발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자아의식의 멈춤을 훈련하는 선정수행이 일상에서 이루어진다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물론 때로는 일정기간 복잡한 현실을 벗어나 고요하고 격리된 공간에서 깊이 집중하는 것도 매우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만일 너무 오랫동안 마음의 외면(外面)인 현실사회를 등한시한 채 내면에만 집중한다면 심각한 마음의 불균형을 초래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나치게 내면세계만을 장기간 주시하면 되면 자연히 주의를 받지 못하는 현실사회에 대해서는 무지(부주의 맹점, inattentional blindness)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현실사회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게(변화 맹점, change blindness) 되어 우리가 진정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여기-지금(here and now)에 머물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종국에는 현실감각이 결여되고,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에 조화롭게 대처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 선정수행이 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연기적 머무름, 연기적 삶의 방식을 깨닫고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마음의 내면세계와 외부세계가 서로의 거울이 될 수 있도록 함께 평등하게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삼학-혜(慧)

지혜는 자비와 함께 대승불교 지향점
자아의식이 멈춘 상태가 지혜의 출발


삼학(三學)의 세 번째 수행인 혜(慧)는 지혜(智慧)의 준말로서 산스크리트어 prajnā를 번역한 말이며 소리나는대로 옮겨 반야(般若)라고도 한다. 알다시피 지혜는 자비와 함께 대승불교가 추구하는 양 날개 가운데 하나로서 수행의 절대적 영역을 차지한다.

흔히 마음수행에서는 지혜를 지식(知識)과 구분해서 지식을 분별적 앎, 또는 앎음알이로 여기는 반면 지혜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 진정한 앎이라고 여겨왔다. 그래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지식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키우는 동시에 지혜의 성취, 또는 깨달음이 지식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오랫동안 지식의 추구를 경시하고 등한시해 왔다. 그 결과 우리가 얼마나 지혜로워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식의 결핍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상대적으로 무식해졌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과연 무식하면서 동시에 지혜로울 수 있는가? 지식과 지혜는 상반된 특성이라서 정말로 지식추구는 지혜를 성취하는데 걸림돌이 되는가? 우리는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지식과 앓음알이를 혼동해 왔는지도 모른다. 사전에 의하면 지식은 경험, 교육, 이치를 통해서 얻어지는 사람, 사물, 상황에 대한 이해와 친숙함이라고 되어 있다. 지식은 경험적 기술이나 전문성, 또는 대상에 대한 이론적 이해 둘 다를 포함한다. 그러니까 지식은 우리가 재활용 할 수 있는 정보와 기술 등을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이와 같이 지식에 대한 정의를 보면 지식은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능력임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은 지식을 “정당화된 진짜 믿음(justified true belief)”이라고 정의했다. 그 믿음이 지나쳐서 집착이 되면 지식의 편리함이나 유용함은 해악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그리고 지식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맹신, 지식성취에 대한 아만심은 역으로 무지와 불행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렇다고 지식을 지혜를 습득하는데 걸림이 되는 장애물로 취급하거나 지식의 가치를 터무니없이 무시하는 것도 또 다른 극단이 아닌가 싶다.

한편 나는 유감스럽게도 앓음알이라는 단어에 대한 사전적 설명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앓음알이를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에 자아의식이 개입되어 객관적 사실, 현상을 왜곡시키는 작용으로 정의했다. 다시 말해서 앓음알이는 인지·지각과정에 아만·아애·아견·아치의 네 가지 자아의식이 작용함으로서 정보가 왜곡돼 현실 삶에 유용하게 재활용될 수 없다. 그러므로 논쟁을 위한 논쟁이고, 이론을 위한 이론일 뿐 실재 삶의 장면에서 유익함을 주기 보다는 갈등과 긴장, 미움 등 불건강한 심리적 상태를 유발하는 것이 앓음알이가 아닌가 여겨진다.

우리가 삶을 경험하고 체험해가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추론, 비교, 판단, 분석 등의 인지·지각과정을 통한 이해와 앎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직관, 통찰 등을 통한 직접적인 앎의 방식이다. 전자는 주객 이원론에 기초한 좌반구적, 이론적, 합리적, 분석적, 언어적 지식의 세계고, 후자는 주객의 경계가 사라진 우반구적, 경험적, 직관적 신체감각바탕의 지혜, 깨달음의 세계다. 또 전자는 타인에게 전달이 가능하고 후자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전달이 불가능하다. 말할 것도 없이 삼학의 세 번째 수행방식인 혜는 후자를 추구한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수행을 통해 얻고자하는 주객의 경계가 사라진 우반구적, 직관적 앎의 세계만으로 일상의 삶을 감당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학교교육과 사회생활을 통해서 얻어진 좌반구적, 합리적, 분석적, 추론적 능력도 현실의 삶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유식적 관점에서 보면 우반구적, 직관적, 통찰적 지혜를 얻는데 치명적인 걸림돌은 지식이 아니라, 그 지식의 습득과정에 개입하는 자아의식이다. 자아의식이 멈추어진 상태가 선정의 극치인 동시에 혜의 출발점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지식과 지혜는 상호의존적 공생 관계
사고 치우침 없어야 연기적 삶도 가능


우리가 대상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데는 추론, 비교, 판단 등을 통한 좌반구적 앎의 방식과 직관, 통찰 등을 통한 직접적, 우반구적인 앎의 방식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자아초월심리학자인 윌리암 브로드(William Broad)가 말했듯이 앎은 이와 같은 두 가지 방식 외에도 사랑, 자비, 공감적 공명, 감정이입 등을 통해 그리고 알지 못함을 통해 아는 앎의 세계가 있다. 특히 대승불교는 자비실천을 통한 앎을 강조하고 선(禪)은 알지 못함을 통해서 아는 세 번째 앎의 방식을 강조한다.

가끔 마음수행을 하는 우리들 가운데는 위의 세 가지 앎의 방식에 대한 이해부족 또는 개인적 욕구에 의해서 어느 한 가지 앎의 방식에 치우치거나 집착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의미의 지혜는 성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인적 인간, 지성과 인격적인 삶을 위해서는 이들의 상호작용, 통합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신구의 삼업을 올바르게 닦고, 여덟 가지 올바른 길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들 방식이 골고루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더러는 마음수행을 지도하는 스승조차도 지식과 앓음알이를 혼동한 나머지 첫 번째 앎의 방식을 배척한다. 또 어떤 스승들은 두 번째 앎의 방식에 골몰한 나머지 세 번째 앎의 방식 자체를 망각해 버린다. 그 결과 제자들의 교육과 성장에 심각한 비효율성, 비현실성을 가져온다. 그런데 정말로 심각한 것은 자신의 앓음알이를 지식이나 지혜, 심지어는 자비와 혼동하고 착각하는 스승이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습득에 네 가지 자아의식을 동원시킴으로서 경험을 아집으로 왜곡시키고 뒤틀리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들이다. 마음수행을 지도하는 스승은 이 세 가지 앎의 방식에 익숙해 있어야 하며,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서 이들 앎의 방식이 충분히 실천되고 체험된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제자들의 특성과 잠재력을 고려하여 상황과 조건에 맞게 그때그때 필요하고 적절한 방식들을 균형 있고 조화롭게 적용하고 훈련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치유적 관점에서 보면 굳이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자뿐 아니라 누구든지 위의 세 가지 앎의 방식을 골고루 조화롭게 훈련하지 않으면 종국에는 인격적 결핍, 지혜의 한계, 깨달음의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 인간이 가진 보다 고귀하고 높은 정신적 특질에는 도달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앎의 방식은 곧 자신의 존재방식이 되고, 그것은 다시 행동반응 양식을 결정짓는 동기가 되므로 오직 자신의 방식만을 고집하게 돼 다르게 아는 방식, 다르게 존재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이들을 수용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갈등, 반목, 미움을 키우게 된다.

마음을 공부를 하는 우리들이 고려해야 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들 세 종류의 앎의 방식 간에는 우열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일찍이 지식보다는 지혜가 더 중요하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그건 상대적 가치다. 지식추구에 치우친 이들에게는 지혜추구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반대로 지혜추구에만 몰두하고 있는 이에게는 지식추구가 필요하다. 자비실천을 통한 앎이나 알지 못함을 통한 앎의 방식에 집착한 이들에게는 앞의 두 가지 방식이 필요하다. 이들은 서로 없어서는 안 되는 상호의존적 관계고 공생의 관계다. 치우침은 반드시 앎의 한계, 존재의 불안, 불건강하고 조화롭지 못한 행동을 유발하고, 그것은 다시 인간관계의 긴장과 갈등, 고통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세 종류의 앎의 방식은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쁘거나 더 필요하고 덜 필요한 그런 것이 아니다. 이들 앎의 방식이 상황과 조건에 맞게 적절하게 작용하면서 조화와 통합을 이룰 때 우리는 진정한 연기적 삶의 실천을 구현할 수 있다. 이들의 부조화나 치우침에 의한 자비나 사랑의 실천은 그만큼 불완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몸 떠난 마음은 망상일 뿐 깨달음 존재치 않아
몸을 바탕으로 바르게 보고 사유하며 정진해야


우리는 신체감각을 바탕으로 아는 앎이 세 가지 앎의 방식 가운데 두 번째 방식인 직관, 통찰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는 몸으로 아는 앎은 추론이나 판단 등의 인지, 지각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아는, 언어 이전의 직관적 앎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선정수행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신체감각을 통한 지혜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이들은 수행과 신체학대를 착각하기도 한다. 그들은 몸과 마음의 기능을 혼동하거나, 몸의 건강과 유지를 위한 정상적인 반응을 비정상적이고 불건강한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성충동 속에는 애정결핍, 사랑과 인정에 대한 욕구, 스트레스 등 심리적 요인이 엄청나게 개입함에도 그들은 그것을 순전히 마음이 아닌 몸의 생리적 욕구 탓으로 돌린다. 그래서 마음대신 몸을 무시한다. 이는 마치 자신의 억압된 성충동에 위협을 느낀 남성이 역으로 여성이 자기를 유혹한다고 투사하고 착각해서 여성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과도 같은 원리다. 또 ‘유식30송’에 의하면 수면의 욕구 자체는 선(善)/불선(不善)이 아니라 중성적 성질임에도 불구하고 건강유지를 위한 정상적인 필요를 마구니라 부르면서 잠이 오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다는 선지식의 깊은 뜻을 외면한다. 그들은 마치 고도의 집중, 몰입이 잠자는 것조차 잊게 만드는 현상을 거꾸로 잠을 자지 않음으로서 집중하게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알고 보면 우리의 몸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지혜롭다. 몸을 통해서 아는 앎을 우리는 몸의 감각(body-sense), 몸의 느낌(body-feeling/felt), 또는 몸의 지혜(body-wisdom)라고 부른다. 한때 타이, 미얀마 등지에서 승려생활을 한 후 미국으로 돌아와 수행지도를 하고 있는 임상심리치료가인 잭 콘필드(Jack Kornfield)는 “우리 몸이 바로 부처”라고 강조하면서 우리는 깨닫기 이전에도 몸을 통해 살고, 깨달음을 이룬 이후에도 몸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티베트의 스승 총카파는 우리의 몸은 오직 이번 한 생애에서만 우리의 것일 뿐 곧 사라져버릴 아름다운 것이니 그 어떤 보석보다도 귀하고 소중하게 다루라고 충고했다.

선수행에 입문하는 이들이 가장 흔하게 듣는 소리 가운데 하나가 선(禪)을 하려면 몸부터 조복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조복받고자 하는 그 주체는 누구인가? 만일 그것이 마음이라면 그 마음은 한마디로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몸이 없으면 존재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과 몸을 함께 가지고 살아가는 정신-신체적 유기체다. 그런데 마음과 몸을 이원적으로 구분하고 마음을 몸의 우위에 놓는 것은 옳지 않다. 깨달음의 여정에는 마음뿐 만이 아니라 몸도 포함되어야만 한다.

치유적 관점에서 볼 때 신체적 심리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는 수행법은 비효과적이다. 잭 콘필드는 자신이 미얀마 사원에서 수행하던 때 스승의 지시에 따라 몸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집중수행에 몰입한 나머지 훗날 잃어버린 몸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수행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부처님은 우리 몸 안에 모든 가르침이 있다고 했다. 몸 안에 고통이 있고, 고통의 원인이 있고, 그리고 고통의 소멸이 들어있다고 했다. 몸을 떠난 깨달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몸을 떠난 마음은 망상일 뿐이다. 선에서 “여기 지금 머무르라”는 말은 바로 마음이 몸을 떠나지 말라는 이야기다. 마음이 몸을 떠나는 순간이 바로 잡념의 순간이기 때문에 마음을 다시 몸의 일부인 호흡에, 단전에, 또는 여러 가지 차크라로 데려오라고 하는 것이다. 몸은 지혜의 보고다. 팔정도에서 올바르게 보고, 사유하고, 노력하라는 가르침은 바로 몸을 홈그라운드로 삼고, 보고, 사유하고, 노력하라는 뜻인지도 모른다.


출처: https://blog.naver.com/tnr2428/220280611969

182.209.25.198 / 2024-05-16 13:47:28 작성